728x90
1호선 동인천역에서 도보로 대략 10분 거리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라는게 있다.
(홈페이지: http://www.icdonggu.go.kr/museum/)
지금은 도시미관을 해치니 불법건축물 해체니 하는 이유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달동네.
그 흔적을 이름 참 특이한 수도국산 박물관에 그대로 살렸다.
난 처음에 수도국산(首道國産)인줄 알았다만;
인천시에 수돗물을 공급했던 수도국(水道局)이 있던 산에 위치해 있어서 수도국산이라고 한다.
대략 6~70년대 '송현상회'의 모습을 재현해 두었다. 이 시절에 작은 규모의 슈퍼마켓은 '상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이타이가 이 시절에도 있었다니.. 잘 보이진 않지만 왼쪽 상단엔 성냥갑도 있다. 이제는 라이터가 보급되서 성냥 만드는 회사들은 판촉 용도로만 생산한다.
80년대까지 흔했던 중고교 교복. 일본에서는 지금도 저런 교복을 입는다.
신문지나 잡지를 벽지로 대신해 사용했던 달동네 주민들.
신분증들. 주민등록제 시행 이전엔 오른편과 같은 도민증을 썼단다.
달동네 철거사업 뒤엔 보이지 않는 건설자본이 따라온다.
옛날 선거 벽보. 아라비아 숫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저렇게 선을 그어 표기해 두었다.
폐지를 수거하는 아저씨.
구두를 수선하는 아저씨.
달동네 마을어귀에 있던 이발소. 이런 모습의 이발소는 최근의 목욕탕 이발소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듯.
달동네 마을에서 그나마 여유가 있는 집은 TV가 있었다. 그리고 집주인은 TV를 보러 온 달동네마을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않았다.
어딜 가나 그시절엔 반공방첩.
이당시에 쥐를 잡았던 이유는 단지 쥐새끼가 전염병을 옮겨서만은 아니다.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에 쥐들은 바퀴 이상으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달동네의 집안 모습.
양은냄비와 볼로 가득한 부엌.
푸세식 공동화장실. 달동네는 수리시설이 부족해서 여러 가구가 화장실을 공유했다.
뭐하는 중이었더라?
70년대 영화 포스터 ㅡ ㅡ;; 이 시절에 영화는 야해야만 검열에 통과했단다.. 3S가 약빨이 있었던 시절(물론 지금도 다를 게 없지만).
쿠데타 이후 물러나겠다던 박정희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어딜가나 구호 투성이었던 시대.
혼식을 그렇게도 강조했던 시절.. 하지만 이제는 쌀이 남아도는 지경이라 백미가 좋다고 강조하는 시대.
옛날 교복과 교련복을 입어보는 체험 코너. 교련이 형식화된 시대에 태어난 게 참으로 다행이다..
칠성콜라와 아리랑 담배. 한때 롯데칠성에서도 콜라를 출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옛날 기계식 전화기. 남들 다 전자식 전화기 쓸 때 우리집에선 저걸 90년대 중반까지 사용했다는;
마지막으로 달동네 골목길 풍경.
비록 넉넉하지 못한 삶이었지만,
아랫집 윗집 사람의 얼굴조차 모르고 사는 현대 도시민들의 일상과는 달리,
달동네 주민들의 마음씨는 넓고 풍요로웠다.
300x250
'천일야화 > 한국과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산과 근대문화유산 (0) | 2011.06.22 |
---|---|
컨테이너 역사 시절 구 양동역, 양동 (0) | 2011.06.16 |
2008. 9. 광주비엔날레 풍경 (0) | 2011.06.16 |